13번째 상념; 졸려서 주절주절 쓰다만 영화 리뷰
주관적 감상평, 스포 주의
'왜 갑자기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가'라고 누군가 물어봐준다면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영상미 때문이다. 옛날 영화 특유의 보드라운 색감도 그렇고 기대하는 바가 컸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회상씬이 계속되는 느낌이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했던 해변가 회상씬! 할 말이 많은 영화다. 어디서부터 적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두서없이 다 털어내는 데에 목적을 두려고 한다.
*글은 남기고 싶은데 진짜 졸려서 정리는 못하고 일부 털어내기만 했다.
1. 1999년의 주드로
주드로가 나오는 영화는 많이 봤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주드로는 처음 봤다. 충격적이었다. 키아누 리브스의 젊은 시절을 본 이후로 사람이 잘생겨서 충격을 받은 건 처음이다. 디키가 주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외모처럼 생겼더라면 이만큼의 몰입도를 끌어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2. 대배우들의 1999년
주드로도 주드로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냥 캐스팅이 미쳤다. 지금은 대배우지만 그 시절 이 배우들의 명성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한 자릿수밖에 안 됐던 나로서는 이 화려한 중년배우들의 새하얗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재미요소가 됐다.
특히나 케이트 블란쳇. 이렇게 우아하게 상큼한 게 가능하다니.
3. 반 크롭의 셔츠
상류층의 캐릭터들이 등장해서인지 코디를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특히 반 크롭 기장의 셔츠를 소화하는 디키가 지워지질 않는다. 반세기를 세련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들은 바로는 배경이 된 시기 때의 미국에서는 통이 좁은 바지가 유행이었다던데(정확하지 않음), 디키는 펄럭거리는 바지를 입고 다닌다. 얼마나 유럽 생활에 진심이고, 미국에서 멀어졌는지 옷으로도 보여주고 있었다.
4. 메르디스와 디키
같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친구가 꺼낸 질문이다.
메르디스는 왜 등장한걸까?
무엇을 위한 장치였을까?
메르디스와 다른 주요 등장인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톰을 디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디키도 마지도 피터도 프레디도 모두 톰을 톰으로 알고 있지만 메르디스만은 톰을 디키로 알고 있다. 톰은 자신을 디키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죽여간다. 하지만 메르디스에게 톰은 처음부터 디키였다.
마지막에 "이제 또 가명을 쓰겠네요?"하고 물어보는 메르디스에게 톰은 "그렇다."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 가명은 톰 리플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신을 톰이라고 아는 사람이 와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메르디스에게는 디키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5. The talented mr.reply
원제를 직역하면 재주 많은 리플리, 뭐 이 정도로 할 수 있겠다. 어쩌다 본 리뷰 중 하나에는 재주가 없는 리플리를 비꼬는 제목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다. 리플리는 말도 안 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특히 순간적인 판단력이 천재적이다. 메르디스와 카페에서 만날 시간을 정할 때도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나눌 대화를 순식간에 예측해서 15분 사이에 두고 약속을 잡는다. 그 순간의 판단으로 너무나도 쉽게 디키로서의 톰도, 톰으로서의 톰이 모두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비교가 된 영화는 <캐치미이프유캔>이었다. 캐치미이프유캔의 주인공도 천재이고, 역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 여기서 리플리의 다른 점은 톰은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6. 톰 중에 가장 무서운 톰
톰, 토미, 토마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이름 중 하나인데, 리플리의 톰은 소름 끼치지 않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옆으로 누워서 편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계속 벌떡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쥐어 싸면서 봤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멈추지 않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무서웠다.
특히나 생각도 못했던 살인하는 장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잔인했다.
7. 피터가 특별했던 것일까
피터만은 죽이지 않길 바랐다. 정말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열쇠까지 받은 피터도 디키인 척하는 톰을 아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톰 리플리의 좋은 점을 읊다가 그렇게나 사랑스러워했던 순수한 톰의 손에 서서히 목이 졸려 죽는 기분은 어땠을까. 화면 없이 소리로만 표현된 피터의 죽음은 공포라고 설명하기에도 그 단어가 주는 묵직함이 부족하다.
여태까지의 살인은 우발적이었다. 계획된 살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터가 메르디스와 키스하는 모습을 봤다고 하는 순간부터 톰은 손에 쥐고 있던 끈을 자기의 목에 대어 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만지작거린다.
자신을 디키로 아는 메르디스와 자신을 톰으로 아는 피터가 한 공간에 있는 게 두려워졌을 것이다. 톰이 가진 천재적인 순발력으로 넘어갈 생각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바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공격성을 보이지 않아도 죽일 수 있게 됐다.
톰은 이제 진짜 미친 살인자가 되었다.
8. 그 후 톰은
2탄이 나왔으면 좋겠을 만큼 톰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피터를 죽이고, 처리하고, 다시 갑판에 올라가 메르디스와 대화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톰이 자신이 디키가 아닌 것을 들키지 않을 방법이 없다.
메르디스와 만나지 않고 홀연히 어딘가로 떠나 조용히 산다면 그래도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9. 돌이킬 수 없게 미쳐가는 것
사람은 간헐적으로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굴 때가 어떤 방식으로든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톰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절대 돌이킬 수 없게 미친 사람이 되어간다. 디키에 대한 동경은 동일시로 변질됐다. 이름마저도 헷갈리기 시작했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은 원래도 희미했지만 이제 살인 자체가 편해졌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궁금해지는 건 경찰에 잡혀가서 심문을 당할 때 톰은 과연 자신을 톰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일지, 디키라고 생각하는 상태일지이다. 사람은 어디까지 망가지고 미칠 수 있는 걸까.
10. 다시 또 도덕 기준의 붕괴
최근에서야 보고 있는 <종이의 집>도 그렇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누가 죄를 지었든 간에 부자보다는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응원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재벌 2세들은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디키는 폭력도 하고, 바람도 피우고, 자신의 애를 벤 여자를 버리지만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진 않았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톰이다.
하지만 디키는 확실히 나쁜 사람인 것 같은데 톰이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오히려 그냥 조용히 어디 도망가서 이제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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