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째 상념; 꿈 기록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언제부터 많이 꾼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떤 객관적인 척도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많이 꾼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굉장히 자세하고 뚜렷한 꿈을 꾼다. 가끔은 너무나 진하게 잔상이 남아 정말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할 때도 있다.
색이 있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고, 무채색의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한 번도 꿈에서 색에 대한 인지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 나는 색이 있는 꿈을 꾸는구나.'하고 깨달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태리의 작은 골목 같은 곳을 걷고 있던 꿈이었다. 걷다가 갑자기 문득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피제리아의 종아리쯤 오는 나무 입간판을 보고 알았다. 마르게리따 피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토마토소스가 확연하게 붉었고, 피제리아 글씨는 귀여운 하늘색에 흰색 테두리로 쓰여 있었다. '아, 나는 색이 있는 꿈을 꾸는구나.'
가장 최근인 오늘 꾼 꿈은 꽤 대화가 길었다. 제주도에 혼자 여행을 떠났던 나는 마지막 날 늦잠을 잤다. 그것도 아마 한참 늦잠을 잔 모양인지 숙소에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선명한 죠스바 색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꿈속의 나는 그 마저도 인지하지 못했다. 파노라마로 펼쳐져있는 풍광에 취해 부둣가에 앉아서 한참을 하늘만 쳐다봤다.
그렇게 감상을 끝낸 뒤에 주변을 구경했다. 독특하게도 을지로 만선포차 거리처럼 테이블이 깔려 있었는데 다들 해산물이 잔뜩 얹어져 있는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벗어나기 힘든 유혹이었지만 비행기를 탔어야 하기에 빠른 걸음으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시내에 내려서는 왠지 친분이 있는 듯한 사람이 운영하는 빈티지 상점에 갔다. 멀버리 가방이 쌓여 있었고, 간간히 샤넬과 버버리 제품이 있었다. 네 가지 정도 장바구니에 담아서 가격을 물어봤는데 500만 원이라는 대답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가장 비싼 제품 두 개를 빼고 두 개만 계산을 마저 했다.
그러고는 사장 언니가 퇴근을 할테니 비행기 시간 맞춰서 편할 때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는 나만 두고 유유히 사라졌다. 의자에 무기력하게 앉아서 비행기 표를 보는데 아직 사용한 표가 아니어서 시간을 변경하면 여전히 사용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봤다. 그래서 정보를 변경하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끙끙거리다가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가고 싶은 곳이 카페였기에 가서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서울에서 알바를 했던 카페였는데 제주도에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꼭 가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곳이었다(실제로는 아직 서울에 있다). 그 카페의 사장님은 두 분이었다. 두 분은 결혼을 앞둔 커플이었는데 꿈에서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카페에 갔더니 남사장님이 반겨주며 오랜만이라고, 먹고 싶은 디저트 아무거나 고르라고 말을 흘리고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했다. 디저트 하나하나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손님들이 들어오고 디저트가 빠르게 줄어나갔다. 결국 아르바이트할 때 가장 좋아했던 빵을 하나 골랐다.
남사장님이 "아니, 디저트가 이렇게 많이 새로 생겼는데 왜 또 그걸 먹어?" 하면서 예쁜 접시에 담아 정신없이 주셨다. 그러고는 대답할 틈도 없이 또 손님을 맞이했다. 나는 기둥 옆에 있는 작은 원형 테이블에 앉아 다시 핸드폰으로 비행기 예약 페이지를 켜고 빵을 먹기 시작했다. 한입 먹었는데 일할 때 먹었던 맛보다 몇 배로 더 맛있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핸드폰을 내려두고 빵에 집중했다. 생크림에 찍어 허겁지겁 먹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내가 정말 보고 싶어 했던 여사장님이 마침 그 카페에 놀러 왔다. 그렇게 긴 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꿈속에서의 나는 과거에 몇 번이나 이 카페에 왔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랬던 이유는 여사장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이렇게 우연히라도 보게 되어서 정말 반갑다고 기뻐했다. 잘 지냈는지, 왜 이 카페를 떠났는지, 지금 행복한지에 대해 많은 것들을 물어봤다.
여사장님은 힘들었다고 대답했다. 아직도 힘들지만 그래도 이제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귀여운 딸 소희가 생겼고, 그래서 더 삶의 활력과 책임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고 정말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존재도 몰랐던 갑작스러운 딸의 이야기에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여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여사장님은 본인을 피하는 남사장님의 친구들과 직원들에게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소희에 대한 얘기를 듣고 두 분의 관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지만 물어보는 건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여사장님을 왜 보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페를 그만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위로받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입을 여는 순간 잠에서 깨버려서 영 속이 편하진 않다. 정말로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었는데. 눈을 뜨고는 그 긴 대화의 여운이 있었는지 반말만 하던 사람에게 꿈에서처럼 존댓말로 대답을 했다.
꿈속에서 혼자 제주로 떠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꿈속의 제주가 주는 분위기는 꿈 안에서는 항상 동일한데 현실의 제주와는 차이가 있다. 현실에 비해 조금 더 이국적인 분위기이고, 더 차분하고, 큰 숲이 있다. 엄청 울창하고 어둡고 거대한 숲이다.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내가 있고 공항이 있다. 현실의 제주와는 다르지만 꿈속의 나는 그곳을 제주로 여긴다.
가끔 이렇게 길고 현실의 조각들이 관여하는 꿈을 꿀 때가 있는데 어디 적어놓질 않으니 이런 이야기들도 다 사라져 버린다. 사라진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에 적어두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드디어 기록을 남긴다. 종종 남겨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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