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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잃을 게 많아서 | 죽음에 대한 고찰 -3

FANCIES

by leechamoe 2022. 1. 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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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상념; 마지막 날에 대한 꿈




사실 죽음에 대해서 글로 정리해보자고 생각했던 계기가 된 영화가 있다. 바로 한동안 뜨거웠던 넷플릭스 영화 <돈룩업>! 죽음을 다루긴 하지만 죽음이 메인 토픽인 영화는 아니고, 정치를 포함한 현실의 많은 것들을 재치 있게 비판하는 블랙코미디 영화다. 본 지 3주가량 지나서, 영화를 봤을 때의 감상이 선명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다. 예상 못했던 엄청난 배우들이 많지 않은 분량으로 얼굴을 비추는 게 가장 재밌는 포인트였다. 갑자기 그 타이밍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나올 줄은 몰랐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들은 제각기였다.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들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난교파티를 벌이거나, 자신들의 실수로 일을 키우고 도망가서 맞이하는 최후가 존엄스럽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리뷰했던 비포 시리즈에서도 그런 얘기가 잠깐 나온다. 내일 갑자기 죽게 된다면 어떡할 거냐는 질문에 호텔에 가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겠다는 제시. 돈룩업에서의 난교파티도 그렇고, 생각보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사람들의 바람이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으로서 본능적인 것들을 많이 누르고 살아가는구나. 누르고 살아온 것들을 다 소진하고 끝없는 쾌락을 느끼다가 가는 것이구나. 어차피 다 죽는 상황이고, 상호 합의하라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내 마지막이 그렇게 자극적이지는 않았으면 할 뿐이다.

필사를 6개월 정도 하고 있다. 한 번에 많은 분량을 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꾸준히 하고 있다. 가장 느린 독서법이라고 하던데, 덕분에 유시민 선생님과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다. 필사를 하고 있는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고,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 유시민은 어떻게 살아보라고 제시하는지 궁금해서 적기 시작했다. 지금은 두 번째 장인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필사하고 있다. 아직 해당 챕터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결국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내용이 연결된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필요하다는 내용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다가 발견한 <임종학 강의>. 개인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 혐오’가 있다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스피스 병동을 굉장히 꺼리는 분위기라고 책에서 말한다. 호스피스 병동을 접할 일이 없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침 채널을 돌리다가 본 <담보>라는 영화에서 몇 년 동안 찾아 헤맨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는(아버지가 아니긴 했다) 소식을 듣고 왜 그런 곳에 가있냐면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찾아 헤맸던 사람이 죽음을 앞둔 장소에 있다는 것 자체로 충격인 것은 맞지만, “호스피스 병동에 있어요.”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장 쉬운 상황을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내가 죽으면 ~”, “죽기 전에~”라는 식의 말을 꺼냈을 때 “뭐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라는 반응, 낯설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환자들은 말도 안 되는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는 상황에서 주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 고통을 줄여주는 것뿐이다. 죽음을 앞둔 부모에게 생전 못했던 효도를 하기 위해,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식들은 승산 없는 수술을 계속 시도하고는 한다. 결국은 그게 부모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엄마랑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내가 만약 죽을병에 걸리면 억지로 수술시키지 마라. 나이 먹어서 수술하면 그게 더 힘들어.”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의료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는데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수술해야지. 왜 내 생각은 안 해?”


여기서 상대방의 생각을 안 하는 건 결국 나였다. 나도 호스피스 병동을 이유 없이 꺼리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죽음 혐오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조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죽음은 결국 삶의 일부였다.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서, 책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졸업식을 치르고, 송별회를 하고, 마지막 퇴근을 하던 날처럼, 아쉽지만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두려워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내 죽음처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는 분명 없을 것이다. 지독히도 슬프고 모든 것이 바스러지는듯한 기분을 느낄 게 확실하다. 아마도 나는 그 이상으로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들의 죽음을 내 죽음처럼 존중하고 그들의 마지막을 원하는 방식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가족으로서, 주변인으로서, 존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의 의사까지는 물어볼 수가 없지만 마지막까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어린 다정함을 베풀며 끝까지 함께할 수 있어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흐릿하게나마 해결책을 찾았다. 그렇다면 다시 <돈룩업>으로 돌아와서, 이제 곧 이름 모를 혜성이 지구에 떨어진다. 주어진 시간은 6개월. 그 6개월이 시작하는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우선 현실적인 것들에 대해 정리할 것 같다. 하던 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하고, 가지고 있는 돈을 6개월 동안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해 볼 것이다. 어느 정도 정돈을 하고 나서부터는 거진 매일 멋들어진 술 상을 준비해서 나의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에 대한 얘기를 한참 나누고 싶다. 같이 취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도 좋으니, 다만 바라는 것은 싸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회사 동료 분들에게도 근사한 한 상을 차려주고 싶다. 내가 챙겨주지 못하는 엄마의 늦은 회사 생활을 챙겨줘서 고마웠다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차를 구해 진하게 타서 나눠 마시며 그들의 인생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보고 싶다.




그렇게 열심히 먹고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날도 비슷하기를 바란다. 대신 가벼운 스킨십조차 인색한 차가운 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온도의 따듯함으로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 6개월 전부터 했었어도 되지만, 그러기엔 내가 안을 때마다 울기만 할 것 같아서 싫다. 차라리 같이 웃고 떠들면서 지내다가, 마지막에 자주 안아주지 못한 것을 작게 후회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은 조금씩 단단하게 준비되어간다. 이제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통한다. 아마도 나는 받은 게 많은 사람이라서 고마운 마음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싶은가 보다.

죽음에 대해 마주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죽기 전에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지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이 닥쳤을 때가 돼서야 깨달았을, 쉽게 놓쳤을 뻔했던 일들을 이제 조금은 하나씩 챙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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