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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대화가 필요할 때 | 비포선라이즈, 비포선셋, 비포미드나잇 후기·해석

FANCIES

by leechamoe 2022. 1. 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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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상념; 마구 나열한 주관적인 비포 시리즈 감상평




비포 시리즈를 두 번째로 봤다. 처음 비포 시리즈를 봤을 때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휘발성에 대해 큰 회의감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에, 심적으로 많이 안정된 지금 지극히도 로맨스 영화인 비포 시리즈를 다시 본다면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지 궁금했다. 다시 보게 된다면 꼭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과 함께 모든 편을 연달아서 보고, 인생에 걸친 이들의 연애와 사랑,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치여 모두 연달아 보지는 못했지만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은 이어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본 소감이 어떻냐고 말하자면, 완전히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유럽에서의 인연이 생각나 그 다음 편을 보기 두려워졌다는 사람과 함께 처음 영화를 봤었다. 그 사람과 함께 비포의 서사를 완전히 보기 위해 따로 비포 선라이즈를 챙겨보고 페이스를 맞췄다. 그렇게 그다음 이야기인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같이 틀어두고 시간을 보냈다. 같이 봤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두려워서였는지, 단순히 이 잔잔한 대화의 흐름에 따라가기에는 현실의 피로감이 컸던 탓인지, 같이 본 사람이 숙면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게 크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시, 셀린느와 같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대화하듯이 영화를 봐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했다. 어떤 사람과 영화를 보는지는 영화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부분에서 의문점을 품고 있다면 영화를 풍부하게 받아들이는데 더욱 도움을 주기도 한다. 덕분에 비포 시리즈를 좀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눈 이야기에서 남은 기억 중 일부를 남겨두고자 한다.




비포 시리즈는 참 은근하게 나를 주인공에 대입시키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괜시리 과몰입하게 된다. 그 과몰입 덕분에 조용하기 그지없는 영화를 쉴 새 없이 볼 수 있었다. 비포 시리즈는 화려하지 않다. 절제된 구도로 내가 마치 제시와 셀린느 둘 중 한 명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있는 느낌을 준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이 떠오를 수도 있고, 단시간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져버렸던 사람이 생각날 수도 있고, 심지어 그런 누군가가 없었더라도 제시와 셀린느 둘 중 한 명에게 빠져 영화를 봤을 수도 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셀린느는 정말 명랑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셀린느를 좋아했고 동시에 내가 셀린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제시를 참 싫어했다.



비포 선라이즈

“셀린느!”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설렘 그 자체 였다. 영화가 그들의 모습, 주변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게 설레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한다. 달아서 정신이 없다. 비포 선셋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두 번째로 봤을 때 느껴진 것은 균열이었다. 나도 정신 못 차렸었던 그 감당하기 어려운 호흡들에 묻혀서 나도 주인공들도 애써 보지 않고 있던 갈등의 시작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젊은 서로의 반짝이는 모습에 끌렸고, 본질이 중요하지 않은 끝없는 대화들에 취해있었다.

제시는 아마도 그렇게 완만하지 않은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반면에 셀린느는 이상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끝도 없는 애정을 가득 받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비롯된 근본적인 차이들이 그들의 문장 속에 묻어 나왔다. 제시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셀린느는 낭만을 알고 신념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차이일 뿐 우위를 가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 중 누구와 대화하고 싶냐는 질문에 우리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셀린느!”



비포 선셋

결국은 다 드러났고 알려졌다


줄거리를 모르고 선셋을 봤을 때 다소 충격적이었다. 결혼을 했다고? 그런데 이러고 있다고? 애까지 있다고? 비포 선라이즈가 꿈같은 하루를 보여줬던 영화여서 비포 선셋도 그러기를 내심 바랐던 것 같다. 다시 본 지금은 어렸을 때부터 현실을 살아가야만 했던 제시는 또다시 현실을 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결혼을 했고, 사랑을 잃은 결혼 생활을 하다가 다시 셀린느를 만났다. 불륜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주했어야 했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비포 선라이즈부터 들었던 인물들에 대한 여러 생각 중 하나는 셀린느가 정말 바라는 것을 도통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시는 다 드러내고 드러나는 사람이고, 셀린느는 알아내고 알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가 셀린느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사실은 셀린느가 제시를 그리워한 마음이 몇 곱절은 더 됐을지도 모르겠다. 제시는 그날 하루 만에 셀린느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결국은 다 드러났고 알려졌다. 성숙해진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는 더욱 그들만의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비포 미드나잇

여전하게 힘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


끔찍하리만큼 싫었던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편. 결국 이들도 파멸의 길을 걷는구나 생각했던 다시 본 비포 미드나잇은 다른 편 못지않게 지독한 로맨스 영화였다. 내가 제시를 만났다면, 혹은 내가 셀린느를 만났다면, 우리는 진작에 부서지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 서로였기에 여기까지 왔고 여전하게 힘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여전히 함께 걸을 때 행복하다. 하지만 현실의 어쩔 수 없는 가시들에 의해 다른 누구나처럼 찔리고 망가져서 아파할 뿐이다. 셀린느는 여전히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런 셀린느의 응석과 애정을 단단히 숨긴 원망들을 알아보고 이해하려 하는 사람은 결국 제시다.

이 둘도 사람이기에 내가 받은 아픔들을 알아내는 건 쉽지만 내가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어려울 뿐이었던 것 같다. 정말 서로가 끔찍이도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싸우고 이렇게 괴상하게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둘은 이렇게 계속 싸우고 계속 화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되고 다시 둘만 남았을 때 이 둘은 계속해서 같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부부의 친구였다면 “또 싸우네. 저러고 또 이상한 농담으로 풀고 나타나겠지.”라고 수십 번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에밀리와 바람피우고 모난 말을 뱉어대는 제시는 조금 많이 밉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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